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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자존심


    선생님은 늘 내 얼굴 가까이 코를 들이 밀고 냄새를 맡으십니다.
    “너 어디서 술을 마시고 눈이 벌개져서 나타난 거야?”
    그리고 불량학생을 대하듯 귀를 잡아끌고 교무실로 향하십니다.
    무릎 꿇고 손을 하늘 위로 치켜들게 하고 한참을 벌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선생님마다 “또 이 녀석이군..” 하는 얼굴로 저를 보셨죠.
    ‘그게 아닙니다 선생님!’ 이렇게 벌떡 일어서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열릴 줄을 몰랐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애써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게 ‘나의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시장통에서 잔심부름 하며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그 때는 모두 어려웠고 우리 집도 많이 어려웠습니다.
    목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일터를 잃은 뒤 장터를 떠돌며 장사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장사에 수완이 없어 번번이 밑지는 장사로 끝내기 일쑤였습니다.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끼니를 제대로 잇기 어려웠습니다.
    그 때 우리 가족의 주식은 ‘술지게미’였습니다.
    곡식으로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를 사다 먹었던 것이죠.


    아침을 술지게미로 때우고 학교에 가면,
    눈이 벌게지고 입에서 냄새가 났습니다.
    가정 형편을 몰랐던 선생님은
    그런 나를 불량학생 취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 동안
    나는 운동장으로 나와 펌프 물로 허기를 달래야 했습니다.

  • 이상한 잔치


    “오늘은 기름집 큰 딸 치우는 날이다. 일손이 부족하니 가서 일 돕고 오너라”
    지친 몸으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말씀하십니다.

    “아, 부잣집 잔치에 가서 음식을 얻어먹고 오라시는구나” 풍성한 잔치 음식을 떠올리자 입에 침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박아, 그 집에 가거든 열심히 일하되 물 한모금도 얻어먹어서는 안된다. ”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우던 때, 어머니의 ‘명령’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우리 형편이 남을 도울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부잣집에 가서 일을 도우라니요.
    게다가 기름진 음식으로 차고 넘치는 잔치집에서 물 한모금도 안 먹고 일만 하는 건 어린 저로선 정말 힘들었습니다.
    손님들이 앉았다 돌아간 자리엔 맛난 음식이 남아있는데, 정말 집어먹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엄하게 당부하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식냄새를 잊어버리려고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만하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돌아오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때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이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주인아주머니가 따로 불러 귀한 사람에게 주듯 음식을 싸주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일을 성심껏 잘 도와주느냐. 집에 가지고 가서 식구들과 먹어라”
    ‘식구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면서도 차마 그 음식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해 끝내 두 손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대문을 나서는 순간 제 가슴은 알 수 없는 뿌듯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집 안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일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인사하고 들어가 “일 마치고 돌아갑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던 내가 오히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당당해졌던 것이지요.
    처음엔 초라한 행색의 나를 못마땅해 하던 이웃들도 달라졌습니다.
    ‘역시 박이네는 달라도 뭔가 달라. 가난해도 아이들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키고 있구먼’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의 사람이 이웃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우리 형제들에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야 어머니가 몸으로 실천하며 가르치신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어머니의 결단


    어머니는 냉철하셨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환상을 꿈꾸지도, 불확실한 미래에 매달리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부모님은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모든 자식들을 다 공부시킬 수 없으니
    한 명만 고등학교, 대학을 보내고
    나머지 형제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공부시키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온 가족이 형 뒷바라지에 매달려야 했고, 막내인 저는 고등학교에 갈 생각을 일찍이 접어야 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를 도와 길에서 장사를 하는데, 중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늘 벌을 주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너 명박이 아니냐!”
    저를 부르는 선생님의 얼굴을 저는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뜻밖에 선생님께서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명박이를 고등학교에 보내주십시오. 그래도 세상을 살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하셨습니다.
    선생님도 8식구가 사는 단칸방을 살펴보시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에도 선생님은 계속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야간학교를 제안하셨습니다.
    일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으니 보내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야간학교는 등록금이 없나요?” 물으셨습니다.
    선생님이 “낮에 벌어서 밤에 다니면 되지요” 하시자, “낮에 번 돈은 다른데 써야 되요” 하셨습니다.
    그 때는 형님을 공부시키는데 온 식구가 힘을 모을 때였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제안을 하셨습니다.
    “전교 수석으로 입학하면 입학금이 면제되고 계속 1등하면 등록금이 면제되니까, 기왕에 못 보낼 거 시험이나 한번 쳐 보게 합시다”
    “좋습니다. 혹시 재수가 좋아 1등을 하더라도, 다니다가 2등만 해도 그만둬야 합니다.” 결국 조건부로 진학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 한겨울의 밀짚모자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저는 어머니와 함께 풀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반죽을 들고 나와 풀빵을 굽다가 오후 5시가 되면 학교에 가고, 끝나면 다시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너하고 나하고 둘이 같이 해선 수입이 적으니 너는 별도로 해야겠다”고 하시면서
    뻥튀기 기계를 빌려오셨습니다.

    며칠 동안 사용법을 연습한 뒤 어머니가 봐 놓으신 자리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곳이 우리 동네 딱 하나 있는 여자중고등학교 들어가는 입구 골목이었습니다.
    새벽에 나가 열심히 준비한 뒤 막 장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여학생들이 골목으로 등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래 여학생만 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사춘기 때,
    아무리 살기 힘든 형편이지만,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등교시간에는 골목 뒤에 숨어 있다가 학생들이 다 등교하고 나면 나와서 일을 했습니다.
    문제는 아침에는 한 시간만 숨으면 되는데
    오후에는 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나오니까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옳지! 밀짚모자를 쓰자. 그러면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챙이 넓은 밀짚모자였습니다.
    밀짚모자를 구해 눌러쓰니 어깨까지 덮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누군가 밀짚모자 위를 주먹으로 콱 쥐어박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뭐가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느냐? 장사를 하려면 손님과 눈과 눈을 마주해야지.
    서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해야 물건이 팔릴게 아니냐!”
    어머니는 호통을 치셨습니다.

    저는 그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우냐. 니가 살기 위해서 남을 속이느냐? 남에게 비굴하게 구느냐?
    니가 네 힘으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무엇이 부끄러우냐.
    너는 당당해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누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까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느라 바빴지만,
    당당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제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

  • 내 꿈은 월급쟁이

    “정말 졸업식도 안하고 서울 갈 거야?”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59년 12월,
    나는 여동생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빈손으로 도착한 서울.
    “과연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컸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장사 밑천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 땅에서,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때 찾아간 곳은 저와 같이 전국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머무는 달동네 합숙소였습니다.
    매일 새벽 5시가 되면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덩치도 크지 않은데 저리 비켜.” “젊은 사람이 이런 험한 일을 할 수 있겠어?”
    일자리를 얻고 싶은 마음에 새벽 일찍 나가도 번번이 덩치 큰 사람들에게 밀리곤 했습니다.

    새벽에 눈 뜰 때마다 ‘오늘은 과연 일자리가 있을까?’ 불안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공치는 날이 많았고, 한 나절 이상 기다렸다가 반나절 일을 얻기도 했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 날은 굶어야 했습니다.
    한 달에 꼽아봐야 열 번 일 나가기도 힘들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여럿이 함께 사는 합숙소인데도 늘 월세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시절이었습니다.

    인력시장에 나가 기다리다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
    어디론가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나도 저렇게 출근을 할 곳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 제 꿈은 바로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월급이 아무리 적더라도 꼬박꼬박 받을 수만 있다면,
    월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지요.
    ‘그래 월급장이가 되자.’
    그것이 서울에 첫발을 디딘 나의 목표였습니다.

  • 청계천 헌책방의 진학 상담 선생님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던 그 시절,
    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게 있었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학교 졸업장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을 거야.” 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 명박아, 결코 대학을 포기하지 말아라. 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다”
    형 역시 내게 대학이란 존재를 늘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감히 대학에 가겠다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엉뚱하게도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중학교 졸업 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이 낫고, 고등학교 졸업장보다는 대학 중퇴가 그래도 낫지 않을까?’
    시험쳐서 대학에만 붙는다면, 대학 중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다니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고, 정말 엉뚱하게도 대학 중퇴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대학입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에게
    누군가 청계천 헌책방에 가면 참고서를 싸게 살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며칠 일당을 모아 청계천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슨 책을 어떻게 사야할 지 몰랐습니다.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주인이 물었습니다.
    “문과야? 이과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습니다.
    내가 상고 출신인 것이 생각나 얼떨결에
    “상과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책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내민 책을 받아들고 보니 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열심히 책을 골라주었는데, 돈이 부족해 못 산다고 하자 주인은 화를 냈습니다.
    “대학 가려는 게 아니고, 그저 시험이나 한 번 쳐 보려는 것”이라고 사실대로 실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대학도 안 가려는 놈이 시험은 왜 보려고,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책방주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한참 보더니 무슨 마음이었는지 “있는 돈만 내고 가거라”고 했습니다.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자 주인은 내 등을 떼밀었습니다.
    “내 맘 변화기 전에 빨리 가 이놈아!”
    저는 정말 맘 변하기 전에 가야겠다 싶어, 책을 가지고 냅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학금


    “어? 내 이름이 있네?”
    합격자 명단에서 발견한 내 이름은 낯설고도 신기했습니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안나뽕이라 불리던 불면제를 먹어가며 밤새워 공부했던 지난 몇 달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나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합숙소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했었습니다.

    ‘드디어 내 꿈을 이루었구나! ’ 하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최소한 한 학기는 등록해야 중퇴지. 합격하고 등록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알아보니 과연 그랬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등록도 하지 못할 것을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했던가?’
    억울하지만 포기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다니지도 못할 대학이지만,
    그래도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장사하시는 이태원 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귀에 속삭였습니다.
    “어머니, 대학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래,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실 뿐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하시고 누군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외쳤습니다.
    “대학이요, 제가 대학에 합격했다구요!”
    어머니는 그제서야 깜짝 놀라셨습니다.
    “아니 네가? 네가 시험을 쳤단 말이야? 네가 정말 대학에 합격했단 말이냐?”
    중학교 밖에 못 보낼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니
    대학시험까지 붙었다고 하니 어머니로서는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어머니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어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등록금이 걱정되셨던 것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대학을 가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시험만 쳐 본 거에요”
    어머니를 위로한 뒤,
    놀란 어머니 얼굴을 뒤로한 채 한없이 달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할 얘기가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아프신 게 아닌가 급히 달려간 저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얘야, 네가 청소 일을 해 준다면
    시장에서 한 학기 등록금과 입학금을 먼저 준다고 한다, 너 하겠니?”
    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딱 대학을 중퇴할 조건이 갖춰진 것입니다.
    제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나는 이태원 시장 청소부가 됐습니다.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바로 시장에 나가 전 날 쌓인 쓰레기를 모아 리어카에 싣고 반포대교까지 갖다 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저에게는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시장 일을 마치고 학교에 가면 늘 녹초가 되어 수업시간에 조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대학 중퇴자가 되기 위해 한 학기 등록금만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저는 쓰레기를 치우며 2학년이 되었고,
    3학년 때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환경미화원들의 보스

    서울시장 선거 개표가 끝나고 당선이 확정된 뒤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이태원 재래시장이었습니다.
    시장 당선을 축하하는 사람들과 함께 환경미화원 옷을 입고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모두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땀 흘려 청소한 뒤 먹는 해장국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취임한 뒤 월급은 등불기금으로 한 복지재단에 맡겼습니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길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한 환경미화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서울시장을 퇴임한 뒤 25개구 환경미화원 노조위원장들이 감사패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감사하다 했지만,
    오래 전 스무살 이명박에게 일자리를 주었던 그 분들에게 드리는 제 진심어린 마음이었습니다.
    오래 전 내가 신세진 것을 갚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심없이 시장 임기 4년을 일할 수 있게 한 채찍질이기도 했습니다.

  • 아파트 분양 이익금을 청소년 장학금으로

    서울시장 시절,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위기로
    서울시내 36만 명 고교생 중 학업을 당장 포기해야할 위기에 놓인 학생이 만 명 가량이나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생이 갑자기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또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저도 어렵게 학교를 다닌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오백 스무 분의 교장선생님들과 서울시 공무원들이 뜻을 모아 하이서울장학금을 만들었습니다.
    당분간 경제가 좋아질 때까지는 서울시가 학비를 대서 이 학생들을 졸업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한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장학금이 그렇게 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게 될 학생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언젠가 10년 후 혹은 20년 후 형편이 될 때
    네가 받은 만큼의 장학금을 후배들에게 돌려줬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어려워져 도움을 받지만,
    언젠가는 내 힘으로 갚을 것이라는 당당함을 주기 위해, 조건 아닌 조건을 달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막 시작한 대학 생활이 꿈만 같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다가 나와 같은 후배들에게 갚겠다고 했습니다.
    한없이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 가난이 되물림 되지 않도록

    끼니조차 잇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시골 소년에게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배불리 밥 먹고,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

    서울에 올라와서 막노동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매일 일하러 나가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참으로 절실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 소망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면서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해서
    직장에서 실적을 내고 빨리 승진했습니다.
    30대에 샐러리맨의 소망인 대기업의 CEO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 저 혼자 이룬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웃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열어준 기회가 있어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행상을 하고 있을 때,
    제 손을 잡아 이끌어 고등학교를 다니게 해주신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대학을 못가고 공사판을 헤매고 다닐 때
    “시험이라도 쳐보라”며 책을 내어 주셨던 청계천 헌책방 주인을 정말이지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일용노동자들이 합숙하던 단칸방에서 늦은 밤까지 공부할 때
    누군가 “잠 좀 자자, 불 꺼라! ” 소리지를 때
    “어린 놈이 공부하겠다는데 그냥 놔둬라!” 라고 두둔해주셨던 연세 드신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한푼 두푼 주머닛돈을 모아 등록금에 보태라고 주고
    쓰레기 청소 일을 하도록 주선해주신 이태원 재래시장 상인들,
    그 때 함께 일했던 환경미화원들은 제 평생의 응원군입니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가난하지만 고마운 이웃들입니다.

    청계천 복원을 시작할 때
    “장사를 해야 먹고 산다”고 하면서 거리로 나와 격렬히 반대하던 상인들의 그 간절한 눈빛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시장인 저에게 가스통을 들이대며 “같이 죽어버리자”고 협박을 하였지만,
    그 눈빛은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청계천이 복원된 후
    시장실로 감사패를 들고 와서 제 두 손을 잡았을 때에는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제가 갚을 차례입니다.
    이만큼 살게 되었고, 과분하게도 이 자리에까지 왔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고마운 분들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남은 소망은
    이웃을 돕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가 가진 것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기업인 생활을 끝내고 공인으로 나섰던 10여 년 전부터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제 마음은 늘 그랬습니다.

    서울시장할 때 4년간 월급 전부를
    소방대원과 환경미화원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쓰도록 했는데 그것도 그런 뜻에서였습니다.

    우리 내외 살아갈 집 한 칸 남겨놓고
    가진 재산 전부를 내어 놓아
    어렵고 힘든 이들을 위해서 잘 쓰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제법 잘 살게 된 것 같지만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늘진 곳이 남아 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조차 어렵고 자식 공부시키는 것조차 포기해야할 만큼 너무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분들이 더 고통 받고 있습니다.

    어려운 분들을 위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고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하는 데 쓰였으면 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살림에 고생하면서도 아들을 바르게 키워주신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늘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남의 도움을 구하기보다 남을 도울 궁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어떤 많은 재산보다 더 소중한 유산으로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이 남기신 말씀을
    이제 제 자식들 앞에서 행할 수 있어 기쁩니다.
    제 뜻을 받아 준 가족들이 고맙습니다.